전체상품목록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현재 위치
  1. 게시판
  2. 갤러리

갤러리

갤러리입니다.

게시판 상세
제목 보면 있고, 안보면 없다.
작성자 초의차 (ip:59.5.74.169)
  • 평점 0점  
  • 작성일 2023-11-06 13:21:10
  • 추천 추천하기
  • 조회수 120


견성(見性) - 마음을 보다 190.

 

만물의 작용(作用)을 깨달아야 한다.

 

견성은

한번으로 끝나지만,

 

깨달음은,

여러 번 거듭해서 체험하게 된다.

 

만물의 본성을 깨달으면,

 

혜안이 열리고,

직관이 작용하고,

법공을 깨닫고,

지혜가 생기고,

환희가 일어나고,

법안이 열린다.

 

이것이

첫 번 째 깨달음을 얻고 나면,

생기는 일이다.

 

반드시,

만물의 본성을 깨달아야만,

 

두 번 째,

만물의 작용을 깨달을 수 있다.

 

만물의 작용을

먼저 깨닫는 일은 없다.

 

견성과 깨달음은

순차적으로 체험을 하게 된다.

 

반드시,

순차적으로 온다.

 

순서가 바뀌는 경우는 없다.

 

만물의 본성을

깨닫고 나면,

 

반드시,

만물의 작용을,

깨닫게 된다.

 

이 과정은,

거의 연이어 나타난다.

 

나는,

만물의 본성과 작용의

깨달음을 14일 동안,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거듭해서,

경험을 했다.

 

하루종일,

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수시로,

깨달음의 상태로 들어갔다.

 

잠깐사이에,

생각이 멈추고,

 

시야에서,

온 세상이 다 사라지고,

 

나도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된다.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곳에

이르면,

 

나는아무 생각도 못한다.

 

나는 없다.

 

스스로 한 경계에 도달하면,

스스로 알아차리게 되고,

 

스스로 자연스럽게,

모든 과정이 진행된다.

 

그 누구도 간섭할 수가 없다.

 

자연스럽게 진행이 된다.

 

만물의 작용은,

일체 만물의 생겨나는 원리이다.

 

만물의 작용은,

만물이 생겨나는 순리이다.

 

만물의 작용은,

만물이 변화하는 법칙이다.

 

만물의 작용은,

만물이 순환하는 이치이다.

 

만물의 작용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

 

오직 하나의 섭리이다.

 

이 모든 것은,

이 원리에서 시작되었다.

 

나는아직도,

그때 경험한 것들을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설명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만물의 작용을 보는 것은,

법안(法眼)이다.

 

법안이

만물의 작용을 본다.

 

법안이 만물의 작용을 보고,

깨달음을 얻게 되면,

 

천안(天眼)이 열린다.

 

천안이 열려야만,

만물의 공성(空性)을 볼 수가 있다.

 

천안이 열리지 않으면,

만물의 작용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반드시,

만물의 작용을 깨달으면,

천안이 열린다.

 

천안이 열리는 것을 보면,

만물의 작용을 깨달았는지 알 수가 있다.

 

만물의 본성을 깨닫는 것과,

만물의 작용을 깨닫는 일이,

연이어 일어난다.

 

서로 반복하여 일어난다.

 

그럼으로,

어떻게 깨달음이 진행되는지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한 동안 정신없이,

깨달음과 환희의 시간이 진행된다.

 

절정의 순간이 지나고,

일상(日常)으로 돌아오면,

 

텅 빈 하늘과 마주하게 된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한동안 넋 나간 사람처럼 된다.

 

긴 침묵에 든다.

 

나는 없다.

아무것도 없다.

영원한 것은 없다.

 

공성(空性)의 참다움을 깨닫고 나면,

공각(空覺)을 이룬 것이다.


2023년 11월 4일.


고월 용운합장.



견성(見性) - 마음을 보다 189.

 

깨달음을 얻으려면 견성(見性)을 해야 한다.

 

견성을 하지 못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다.

 

반드시,

견성을 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견성을 해야 혜안(慧眼)이 열리기 때문이다.

 

혜안이 열리지 않으면,

견성을 하지 못한 것이다.

 

견성은 깨달음이 아니다.

마음의 본성을 본 것뿐이다.

 

견성을 해야만,

혜안이 열리고,

 

혜안이 열려야만,

직관(直觀)이 생기고,

 

직관이 생겨야만,

만물의 본성을 볼 수가 있다.

 

만물의 본성을 보고,

만물의 본성이 텅 비어

()한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이다.

 

혜안이 열리면,

생각이 멈추고,

생각이 멈추면,

육안(肉眼)이 작용을 멈추고,

 

육안이 작용을 멈추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나도 사라지고,

세상도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다.

텅 비어 있다.

 

비로소

혜안이 작용하면,

직관이 열리고,

 

직관이 작용을 하면,

만물의 본성을 볼 수가 있다.

 

직관이

만물의 본성을 보는 것이다.

 

만물의 본성을

법성(法性)이라고 한다.

 

법성이 텅 빈 것을 보고,

()한 것을 알아차린다.

 

이를 법공(法空)이라고 한다.

법성(法性)이 공()한 것이다.

 

혜안이 법공을 알아차리면,

지혜(智慧)가 생긴다.

 

지혜가 생기면

의식이 이를 인식한다.

 

의식이 법공을

인식하는 순간

환희(歡喜)가 일어난다.

 

환희는 점점 증폭이 되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진다.

 

한 동안 환희가 절정에 달하면,

온몸에 전율이 일어난다.

 

진정이 되고나면,

법안(法眼)이 열린다.

 

견성을 할 때는,

환희가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만물의 본성과 작용을

깨달을 때만 환희(歡喜)가 일어난다.

 

견성을 할 때는,

지혜가 생기지 않는다.

 

혜안도 생기지 않고,

직관도 열리지 않고,

지혜도 생기지 않고,

환희도 생기지 않고,

법안도 열리지 않는다.

 

오직,

만물의 본성을 보고,

법공을 깨달아야만 생긴다.

 

법공(法空),

아무것도 없고,

텅 비어 있다.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세상도 없다.

 

아무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만물의 본성은 공()한 것이다.

 

만물의 현상(現象),

우리 눈으로 볼 수가 있지만,

 

만물의 본성은,

우리 눈으로 볼 수가 없다.

 

이것이,

만물의 본성을 보고,

법공(法空)을 깨닫는 과정이다.

 

이것이,

첫 번째 체험하는,

깨달음이다.


2023년 11월 2일.


고월 용운합장. 




견성(見性) - 마음을 보다 188.

 

마음마음의 본성성품.

 

견성을 해서,

마음의 본성을 보고나면,

 

마음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마음은 본래,

이름이 없다.

 

마음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도 잘못이다.

 

이름이 없는 것이,

진실이다.

 

본래 이름이 없는 것을,

억지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옳은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마음이

본래부터 이름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이름이 없다.

 

마음이라고 해도 안 된다.

 

그 무엇이라고 해도

잘못이다.

 

그러나,

보지 못하고알지 못하는 사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름을 붙여

설명을 하는 것이다.


다만,

이름에 집착하지 않으면,

속지 않는다.

 

마음은,

아무것도 없다.

 

텅 비어 있다.

 

그래서,

()이라고 한다.

 

이 말도 잘못된 말이다.

사람들이 속기 때문이다.

 

나도 없다.

 

내가 없기 때문에

무아(無我)라고 한다.

 

남도 없다.

세상도 없다.

 

어떤 물건도 없다.

 

한 물건이라고 해도

잘못된 말이다.

 

한 마음이라고 해도,

잘못된 말이다.

 

소리도 없다.

 

아무 소리도 없다.

고요하고고요하다.

 

냄새도 없다.

느낌도 없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빛깔도 없다.

 

수상행식(受想行識)도 없다.

 

그럼으로,

마음은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이고,

무명(無名)이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비유일 따름이다.

 

마음은,

밝다어둡지 않다.

 

태양이 없어도 밝다.

달이 없어도 밝다.

 

항상 밝다.

어두워지는 법이 없다.

영원히 밝다.

 

마음은,

생명이 없다.

 

그럼으로,

태어나거나 죽지 않는다.

생사가 없다.

 

마음은,

물질이 아니다.

 

그럼으로,

생겨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다.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오염되지도 깨끗해지지도 않는다.

 

마음은,

방향(方向)이 없다.

 

동서남북이 없기 때문에,

아래도 없다.

 

마음은,

시간(時間)이 없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과거현재미래가 없다.

 

마음은,

공간(空間)이 없다.

 

공간이 없기 때문에,

여기저기가 없다.

 

이곳저곳이 없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이 없다.

 

마음은,

하나이다.

 

나누어지지도 합쳐지지도 않는다.

변화하지도 환원하지도 않는다.

움직이지도 멈추지도 않는다.

 

마음은,

본래 있는 것이다.

 

본래부터 있는,

영원불멸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모든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모든 것의 시원이다.

 

바다와 같은 것이다.

생명의 바다.

 

()에서 유()가 나왔다.

 

오직 마음만이,

홀로 존재한다.

 

보면 있고,

안보면 없다.

 

이것이 마음이다.


2023년 10월 31일.


고월 용운합장.




견성(見性) - 마음을 보다 187.

 

마음을 보려면 견성(見性)을 해야 한다.

 

견성을 하지 못하면,

마음을 볼 수가 없다.

 

마음을 보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다.

 

견성이 아니면,

볼 수가 없다.

 

마음을 보는 방법은,

다른 방법이 없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견성한 사람이 많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보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다.

 

오직 견성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명상을 통해서 견성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할 것이다.

 

아니다.

명상은 견성을 하지 못한다.

 

그럼으로,

명상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찰나(刹那)견성을 해도,

마음을 볼 수가 없다.

 

온전한 견성을 해야

마음을 볼 수가 있다.

 

마음은 본성과 작용이 있다.

 

마음은,

본성을 가리킨다.

 

마음의 작용은,

의식(意識)이다.

 

마음의 본성만이,

마음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의식은,

반은 정신이고,

반은 물질이다.

 

마음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의 본성은,

성품이다.

 

마음의 본성인,

성품을 보는 것을 견성이라고 한다.

 

그럼으로,

견성은 마음의 본성을 보는 것이다.

 

오직,

마음의 본성을 보는 것을,

견성이라고 한다.

 

마음의 본성을

무엇이 보는가.

 

마음의 작용인,

의식(意識)이 본다.

 

의식은 본성과

작용이 있다.

 

의식의 본성은 인지(認知)이고,

의식의 작용은 인식(認識)이다.

 

견성을 할 때,

의식은 깨어 있다.

 

의식이 깨어 있어서,

인지가 작용을 한다.

 

마음의 본성을 보는 것은,

의식의 인지가 보는 것이다.

 

의식의 인식은

작용하지 않는다.

 

의식의 인식은,

견성에서 깨어나야만 작동을 한다.

 

견성 상태에서는

오직 인지만 작동을 한다.

 

인지가

마음의 본성을 보는 것이다.

 

인지가 본 것을,

인식이 인식하여

대뇌에 저장하는 것이다.

 

인지가 본 것을,

견성에서 깨어나면,

인식이 작용하여 저장을 한다.

 

그럼으로,

견성은 의식이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의식이 깨어있어야,

견성을 할 수가 있다.

 

마음의 본성이 DNA라면,

마음의 작용인 의식은 RNA와 같다.

 

의식의 인지와 인식의 작용이,

마치 꿈을 꾸는 것과 비슷하다.

 

꿈을 꿀 때는

의식의 인지가 작용을 한다.

 

꿈에서 깨어나면,

의식의 인식이 이를 인식해서 저장한다.

 

견성에서 의식이 깨어나는 것과.

꿈에서 의식이 깨어나는 것이 비슷하다.

 

그러나,

견성은 의식이 투명하게 깨어있고,


꿈은 의식이 렘수면 상태로,

반수면 상태이다.

 

견성과 꿈은 이점이 다르다.

 

그러나,

둘 다 깨어난다는 말을 쓴다.

의식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반드시 견성을 해야

마음을 볼 수가 있다.

 

마음을 보면,

모든 것이 분명해 진다.

 

마음을 보는 방법은,

견성을 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마음의 본성만을,

마음이라고 한다.


2023년 10월 29일.


고월 용운합장.



견성(見性) - 마음을 보다 186.

 

나는 세상을 인식(認識)으로 알아차린다.

 

내가 아는 세상은

내 의식이 인식한 것이다.

 

내가 아는 세상은,

내 인식과 기억(記憶)뿐이다.

 

내가 아는 세상은,

내 인식으로 이루어졌다.

 

내가 아는 세상은,

내 인식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세상은,

내 인식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내가 아는 세상은,

나의 인식이 지어낸 것이다.

 

내가 아는 세상은,

남이 인식한 것은 없다.

 

내가 아는 세상은,

나만의 세상이다.

 

내가 아는 세상은,

남과는 다른 세상이다.

 

내가 아는 세상은,

같은 세상을 보아도

남과 다른 인식을 한다.

 

내가 아는 세상은,

항상 인식은 변한다.

 

내가 아는 세상은,

인식이 변한만큼 다르다

 

내가 아는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인식도 변한다.

 

내가 아는 세상은,

인식의 변화가 만든다.

 

내가 아는 세상은,

항상 변화 속에 존재한다.

 

인식은,

항상 현존하는 것만 인식한다.

 

인식은,

항상 현상만 인식한다.

 

인식은,

항상 현재 이 순간만 인식한다.

 

인식은,

빛의 속도로 인식한다.

 

인식은,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

 

인식은,

기억의 도움을 받아서 인식한다.

 

인식은,

판단을 할 때 기억의 도움을 받는다.

 

인식은,

중복되는 것은 저장하지 않는다.

 

인식은,

나를 만드는 작업을 한다.

 

인식이 하는 일은,

모두 내가 하는 일이다.

 

눈이 본 세상과,

의식이 인식한 세상은 다르다.

 

눈은

사물의 정보만 전달한다.

 

눈은,

사물의 사진을 찰영한다.

 

눈은,

판단 능력이 없다.

 

모든 판단은

의식의 인식이 한다.

 

그러므로,

눈이 본 세상과,

의식이 인식한 세상은 다르다.

 

오관육근육경이

본 세상은 사물의 현상이다.

 

의식이 인식한 세상은,

분별하고 판단한 세상이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아는 세상은,

모두 의식이 인식한 세상이다.

 

내가 인식한 세상과

남이 인식한 세상은

같을 수가 없다.

 

저마다,

모두 다르게 인식한다.

 

이것이,

내가 아는 세상과,

남이 아는 세상의

차이를 만든다.

 

이것이,

내가 사는 세상과,

남이 사는 세상의,

다른 점이다.

 

이것이,

내가 사는 세상이다.

 

이것이,

남이 사는 세상이다.

 

세상은 하나인데,

서로 다른 삶을 사는 것은

인식의 차이로 발생한다.

 

인식의 차이가,

서로 다른 삶을 살게 한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만큼 삶을 산다.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만큼만 누리고 산다.

 

이것이,

세상을 다양하게 만든다.

 

이 세상이

다양하게 만들어진 것은,

인식의 차이 때문이다.

 

나의 인식은

나의 세상을 만들고,

 

남의 인식은,

남의 세상을 만든다.

 

인식의 차이를 극복하면,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세상의 다툼을 멈추는 길이다.


2023년 10월 27일.


고월 용운합장.




견성(見性) - 마음을 보다 185.

 

()는 눈으로 볼 수 없다.

 

무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무는,

있던 것이 없어지면 무가 된다.

 

무는,

본래부터 없는 것도 있다.

 

무는,

공과 함께 없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

일체가 다 사라진 텅 빈 것을 말하고,

 

()

()와 상대되는 없음이다

 

공은,

상대가 없다.

 

공은,

진공(眞空)이 있다.

 

공과 진공은,

같은 것이지만 사용하는 법만 다르다.

 

무는

참된 무()가 없다.

그냥 무()일뿐이다.

 

무는,

없어지는 것에 사용한다.

 

무는,

빛을 반사하지 못 한다.

 

유는,

물질로서 빛을 반사하지만,

 

무는,

물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는 빛을 내거나 반사하지 못한다.

 

무는 형상이 없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다.

 

무는 소리가 없다,

그래서 들리지 않는다.

 

무는 냄새가 없다.

그래서 맡을 수 없다.

 

무는 느낌이 없다.

그래서 느낄 수 없다.

 

이와같이,

무는 눈으로 볼 수가 없다.

 

무는,

의식의 인식에만 존재한다.

 

무는

의식이 인식하는 것이다.

 

무는,

의식이 기억하는 것이다.

 

무는,

머릿속에서만 존재한다.

 

무는,

인식하는 순간만 존재한다.

 

무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인식하는 것이다.

 

무는,

공간이 텅 빈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눈은 텅 빈 공간을 볼 수가 없다.

 

눈이 볼 수 있는 것은,

물질 뿐이다.

 

눈이 볼 수 있는 것은,

물질이 반사한 빛만 본다.

 

눈은 물질이 아닌 것은,

볼 수가 없다.

 

눈은

물질이 반사한 빛만 본다.

 

그러므로,

눈은 무를 볼 수가 없다.

 

무는,

물질이 아니라 빛을 반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는,

볼 수는 없지만,

인식은 할 수가 있다.

 

무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2023년 10월 25일.


고월 용운합장.



첨부파일 견성-190.jpg , 견성-190-1.jpg
비밀번호 삭제하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댓글 수정

비밀번호 :

/ byte

비밀번호 : 확인 취소

댓글 입력
댓글달기 이름 : 비밀번호 : 관리자답변보기

영문 대소문자/숫자/특수문자 중 2가지 이상 조합, 10자~16자

/ byte

왼쪽의 문자를 공백없이 입력하세요.(대소문자구분)

회원에게만 댓글 작성 권한이 있습니다.



장바구니 0

맨위로